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한의 핵개발 (문단 편집) === 재경색과 [[북한의 2차 핵실험]], 김정일의 사망 (2008 ~ 2012) === 이명박 대선후보는 '비핵/개방 3000'이라는 다소 생소한 대북정책을 주장했는데, '선 비핵화 후 개방/투자'라는 얼핏보기에는 기존 햇볕정책과 차별점이 없는 듯 보였다. 다만 기존 햇볕정책의 내재된 문제점이었던 대북지원의 불투명성과 1차 핵실험으로 떨어진 신뢰 회복의 책임을 북한에 있다고 간주하여 "그랜드 바겐"이란 이름 아래, 비핵화, 지원채널 투명화, 금강산 피격사건 사과를 조건으로 하되 이에 응할 시 햇볕정책보다 더 큰 지원을 약속하지만, 취임 이후 2월부터 외교부는 북한의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외교적 진척이 없다는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였고 이후 남/북간의 합의 이행에 대한 불안감이 상존하였다. 당시, 비핵/개방3000에 대한 상세지침은 나오지 않았으나 대통령의 공약을 근간으로 2월부터 진행되었고 남북한은 상호비방, 핫라인 붕괴와 같은 현상을 겪었다. 더불어 이명박 정부는 북한과의 핫라인 단절 이후 모든 외교적 협상권을 미국에게 넘기면서 남한-북한간의 협상에 미국이 참여하는 것이 아닌 북한-남한간의 협상으로 이권을 이양하면서 사실상 남한은 북한에 대하여 손을 놓았다. 그러고서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방문 이후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타게 됐고, 이 과정에서 발발한 촛불집회 이슈로 인해 이명박 정부는 일순 식물정부화 되었다. 당시 일부 계층에서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계층들이 남한에서 촛불집회라고 선동한다는 등의 불을 지폈다. 정부의 행정이 일순 위축이되면서 외교적 라인은 제한되었고 미국-북한간의 합의 이행에 대한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도 두손 놓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 해 8월 26일, 북한은 사전협약과 달리 테러지원국 해제가 연기되자 연기가 10.3 합의(제2차 남북정상회담) 위반이라며 '대응조치' 로 영변 핵시설 불능화 중단과 원상복구 고려한다는 입장을 발표했고, 9월 19일엔 북 외무성 대변인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 중" 이란 내용을 발표했다. 식겁한 미국은 10월 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기로 발표했다. 또한 이명박 정부가 07년 비핵화 합의에 따른 남한의 북한 핵연료봉 구입을 국제 시세보다 두 배라는 이유로 중단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 방송이 북한내에서 사라지고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되었다. 그러나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 문제나 연료봉 구입 문제는 이 9.19 공동성명과 6자회담의 붕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 문제는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신고와 영변 핵시설 시료 채취를 지속적으로 거부하자 미국이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선택한 것으로, 책임은 북한이 져야 할 사안이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비핵화 검증 과정에서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신고를 한사코 거부했다'''는 데 있었다.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플루토늄 재처리 프로그램만을 신고했으며, 그나마도 영변 핵시설에서의 시료 채취(IAEA의 표준 검증 절차다!)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 또한 필수적인 검증과정으로 미신고시설에 대한 IAEA 사찰단의 자유로운 사찰을 요구하는 참가국들에게 신고된 시설 사찰과 서면 확인, 연구자에 대한 인터뷰만이 가능하다고 강짜를 놓았다. 애초에 제2차 북핵위기가 비밀 HEU 프로그램 발각으로 시작되었음을 고려하면 HEU 프로그램 미신고와 신고시설에 한한 사찰 허용은 사실상 검증 자체를 거부한 것과 다름 없었다. 결국 그 해 12월의 6자 회담은 검증의정서 채택 실패로 끝났다. 이 시점에서 9.19 공동성명은 비핵화 검증에 실패하면서 붕괴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200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북핵 문제에 있어서 부시 정부의 실패를 계속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부시 정부의 실패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라는 대북 무시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해가 바뀐 [[2009년]] 4월, 북한은 6자 회담 불참을 선언하고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훈련 참여는 곧 선전포고라고 주장했다. "영변 핵시설 폐연료봉 재처리작업 착수" 를 주장한 북한은 2차 핵실험을 실행했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잠시 동안 뒤이어 사망한 [[김대중]] 대통령 [[국장]]에 따른 조문외교와 클린턴의 방북으로 완화되는 듯 싶었으나 북한은 결국 9월 자체 [[우라늄]] 농축 시험 성공을 선포해버렸다. 이후 11월 10일엔 이에 맞물려 [[대청해전]](대청도 교전)이, 다음해 [[2010년]] 3월 26일엔 [[천안함 피격사건]]이 터졌으며 5월엔 자체 [[핵융합]] 성공을 주장했고, 11월에는 수백 개의 원심분리기를 갖춘 우라늄 농축시설의 존재와 [[2012년]] 목표[* 이후 1년 연기돼서 2013년 완공됐다.]로 영변 지역에 100MW 규모의 실험용 [[원자력 발전소|경수로]]를 건설 추진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같은 달인 [[11월 23일]]에는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다. 이 우라늄이 왜 중요하냐면 미국은 북한이 비밀리에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이 제네바 합의 붕괴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북한은 부시가 먼저 있지도 않은 우라늄 핵개발을 빌미로 제네바 합의(이건 [[플루토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를 깼고 그래서 봉인된 플루토늄으로 개발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미국 측의 설명으로는 2001년 부시 행정부 시절 방북해서 핵 협상을 하던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당신들, [[우라늄]]으로 핵개발하고 있지?'''' 라고 추궁하자 북측에서 '''그래'''라고 했다는 건데 북측은 전혀 그런 바 없다고 주장했지만 연평도 포격 사태 11일 전인 2010년 11월 12일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를 공개했고, 이는 당초의 부인이 완전한 기만이었다는 해석의 근거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북한이 과연 2002년에 핵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확보하려 의도했는가는 다른 문제라고 반론한다. 2002년 당시 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대규모 우라늄 농축시설을 짓고 있으며 2000년대 중반에 완공할 예정이라고 주장하였는데(그리고 이는 제임스 켈리 파동의 근거가 되었다), 2007년에는 미국 측 스스로 이 정보의 신뢰도를 낮추면서 논란이 일어난 것이 근거라는 것이다. 게다가 2010년에 방북한 핵물리학자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북한이 공개한 대규모 우라늄 농축시설이 그 해에 완공된 것이라고 보고했으며, 결론은 북한이 플랜 B로 우라늄 농축을 준비하긴 했지만, 실제로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실행한 것은 제네바 합의 기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도 덧붙인다. 하지만 이건 전형적인 증언 왜곡으로, '''헤커 박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 해에 완공되었다는 것은 북한측의 주장에 불과하며, 헤커 박사는 이에 대해서 기술적 난이도상 "신뢰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https://www.foreignaffairs.com/articles/northeast-asia/2010-12-09/what-i-found-north-korea]]][*원문 "Our hosts told us that construction of the centrifuge facility began in April 2009 and was completed a few days before our arrival. That is not credible, however, given the requirements for specialty materials and components, as well as the difficulty of making the centrifuge cascades work smoothly."][*번역 "초청측(북한)은 우리에게 원심분리시설은 2009년 4월부터 건설을 시작했으며 며칠 전에 완공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특수한 원자재와 부속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원활하게 가동되는 원심분리실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주장은 신뢰할 수가 없다."]. 오히려 헤커 박사는 같은 글에서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이러한 설비들이 '''수년 전부터 다른 장소에서 건설되어 가동에 들어갔으며''' 새로운 시설로 옮겨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원문(2) "The most likely scenario is that the equipment was built and brought into operation over many years at a different location and then moved into the new facility."]. 2017년 보도에 따르면 CIA는 이 "다른" 우라늄 농축시설이 2005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1231681|#]] 바로 이러한 평가 때문에 북한의 원심분리시설 공개가 '''완전히 의도된 기만'''의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2011년]] 12월 북한 핵개발의 최고 책임자인 [[김정일]]이 사망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혹시나 상황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헛된 희망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북한의 핵 개발은 더욱 급격히 진척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